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말의 힘줄을 끊어라!"

말의 힘줄은 파워를 의미한다
최근 새벽기도 말씀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다. 늘 은혜를 주시는 말씀들이지만 특히 심령 깊이 확신으로 다가온 말씀이다.

역대상 18장 6절의 말씀인데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동일한 말씀이 13절에 또 한번 나온다. 한 장의 본문에 이처럼 두 번이나 반복되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다윗의 승리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좀더 자세히 보면 6절은 북쪽으로 나갈때고, 13절은 남쪽으로 나갈때다. 곧 사방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승리를 안겨주신 것이다. 물론 이 승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다윗의 언약으로 이어가시며 그 약속대로 역사하심이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처럼 사람이 꺽을 수가 없다. 하나님 앞에는 대적이 없다. 그러면 왜 다윗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기 때문이지만 다윗편에서는 무엇을 하였는가?

이전에는 이 말씀의 앞 구절이 눈에 안들어 왔었다. 그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는 승리의 구절만 들어왔다. 목사의 눈으로도 내가 보고 싶은 구절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새벽묵상에서는 달랐다. 앞의 3,4절이 크게 다가왔다. 소바 왕 하닷에셀과 다윗의 하맛에서의 싸움 사건이다. 이 전쟁에서 다윗은 소바 왕에게서 병거 천대를 빼앗는 승리를 거둔다. 그런데 다윗이 승리 후에 이상한 일을 행한다. 곧 병거를 끄는 말 가운데 백필만 남겨두고 구백필의 발의 힘줄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상식적이지가 않다. 천필의 병거면 얼마나 나라에 힘이 되겠는가? 얼마든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다. 그런데 90%를 버린다. 다 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다윗이 왜 이렇게 행했을까?

묵상은 폭포수처럼 은혜를 부어준다. 다윗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왕을 달라고 하면 왕은 세가지는 하지 말고 한가지는 반드시 행하라고 하셨다. 그 중 하나가 병거를 많이 갖지 않는 것이다. 왜 병거를 많이 갖지 말라고 하셨는가?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의 병거요, 힘이시요, 능력이 되시기 때문이다. 만약 왕이 병거를 많이 소유하고 더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보다 군사력을 힘으로 삼는 증거가 된다. 세상은 그렇다. 힘을 추구한다. 권력을 의지한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다르다. 오직 하나님만이 힘이시다. 다윗은 바로 이 말씀을 간파하고 90%의 말의 힘줄을 끊어 버린다. 그의 고백이 무엇인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이처럼 힘이 되신 하나님과 말의 힘이 어찌 비교 될 수나 있겠는가? 그러니 다윗의 믿음의 결단을 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오늘날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믿음의 사람이다.믿음은 무엇인가? 말의 힘줄을 끊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으로 삼았던 것,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것,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자리잡고 왕노릇하려는 것, 많은 경우 그것은 우리 자아요, 사람이요, 물질이요, 야망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힘줄처럼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들을 끊어내지 않고는 결코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 할 수가 없다. 믿음이 무엇인가? 내가 의지하던 것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작지만 실제적인 끊음의 결단은 어디로 가든지 승리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누리게 한다. 지금 이 순간 성령께서 끊어야 할 것을 깨닫게 하시는가? 당신이 하나님보다 더욱 붙들고 있는 것이 있는가? 지금 끊어라! 그러면 비로소 경험하게 될 것이다. (*)


2014년 10월 27일 월요일

"도고 기도"

임재하시는 하나님
회를 개척하여 섬기면서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어떤 특정한 사람의 것이 아닌 모든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열쇠를 잘 사용하는 사람은 하늘의 보고를 받아 누리고, 그 열쇠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의 보고를 닫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선물을 다 받아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임하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우리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고 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두 손은 놀랍게도 한 손은 하나님의 보좌를 붙잡고 다른 한 손은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의 어깨를 붙잡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소와 시간과 상관없이 우리는 기도의 영적네트워크로 서로를 도울 수 있습니다. 사실 남을 위해 하는 기도를 그동안 중보기도로 지칭해 왔습니다. 그러나 중보기도는 오직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mediator)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보좌 우편에서 이 땅의 자기 백성을 위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모르고 사용해서도 안되는 것이지만 알고 그렇게 계속 사용하는 것은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중보기도자입니다 라고 하면 예수님 자리를 빼앗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고 겸손한 사람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성경적 용어를 제대로 사용해야만 제대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성경대로 중보기도는 예수님이 하시는 기도로 정리해 드립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위해하는 기도를 무엇이라 칭해야 합니까? 성경에서는 도고 기도라고 합니다'도고'는 헬라어로 '엔튜크세이스' 라고 합니다. 딤전 2:1, 딤전 4:5 절에 나옵니다. 그 뜻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기도,탄원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도고(禱告:intercession)이웃을 위한 기도’(Prayer to God for Neighbor:NIV) 입니다. 반면에 딤전 2:5에서 '중보'라는 헬라어는 '메시테스'입니다. 이 말의 뜻은 계약을 맺기 위해 두 사람 사이를 중보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곧 예수님의 중보적 사역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에 걸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 누구도 중보자가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새언약의 중보자가 되신다(9:15)는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감히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중보자라고 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고와 중보라는 말의 헬라어 원뜻이 다름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드리는 기도를 중보기도라 하는 것이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도고기도라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욱 예수님의 중보기도와 성도간의 도고기도로 더욱 강건하게 세워져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귀하게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우리 LWC 안에 새롭게 도고기도사역(담당 황희순 권사)이 열릴 것입니다. 도고기도에 겸손함과 열정으로 참여하여 주님 나라와 교회와 성도를 위해 도고하는 역사가 넘치길 소원합니다.(*)


2014년 10월 1일 수요일

설립감사예배, 주님께 영광올립니다!

KM 주일2부 예배
예수님의 생명값으로 세우신 교회가 오늘날 이 땅에 세워질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물론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말씀으로 사는 교회의 비전은 교회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이 땅에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주시도록 간구하고 그것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세우시려 한 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현이요, 브랜치입니다. 이 땅에 성도는 교회공동체로 하나가 되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다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로 편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교회는 그 나라를 대망하고 사모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에 우리 공동체가 설립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이 주신 선물 중에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받아 누리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지난 29일에 첫예배를 드릴 때가 기억납니다. 벌써 오래된 역사 같습니다. 이제 8개월이 지나 이처럼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교회를 세워가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리는 예배를 드리게 되어 참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이제 막 예수님의 생명으로 태어난 우리 말씀으로 사는 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워져 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참으로 주님 앞에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설립감사예배는 우리 공동체의 축제의 날입니다. 이 날은 외부의 손님들도 초대하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에 대해 함께 감사하고 함께 기뻐하는 날입니다. 특히 10월 첫째주일로 설립기념주일을 정한 것은 우리 영어 교회인 CCC가 바로 3년전 10월 첫 주부터 예배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인교회 역사상 하나님께서 EM KM의 개척을 돕는 초유의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선물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독특한 정체성입니다. 대부분의 한인교회의 역사는 KM이 먼저 교회를 세우고 필요에 따라 EM이 세워지는 현실이다 보니 EM을 단지 한 부서나 자녀들의 모임정도로만 인식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다르게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한 몸에 양팔이 있듯이 CCC LWC는 건강한 한 몸의 지체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신 이 역사에 감사하며 제자도와 말씀과 성령으로 온전히 무장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의 교회는 여전히 전투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대적 사명인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밖에 있는 비진리와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며 주님의 날을 준비하고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해야 합니다. 이 첫걸음부터 놀랍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주님의 몸이 되길 소원합니다. (*)


2014년 9월 3일 수요일

엘리사의 현실감각


새벽성경강해를 통해 개인적으로 받는 은혜가 큽니다. 평생 새벽성경강해의 꿈이 이제 실현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은 엘리사의 현실감각에 큰 은혜를 받고 새벽묵상을 짧은 글로 함께 나눕니다.
 
아람 왕이 번번히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려 작전을 세우고 진을 쳐 기다려도 어떻게 된 것인지 이스라엘은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아람 왕이 침상에서 하는 생각까지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람 왕은 도단성읍에 머무르고 있는 엘리사를 잡으러 군대를 보냅니다. 아침에 문을 열고 밖에 아람 군대가 포위한 것을 본 사환은 엘리사에게 어찌하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습니다. 그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이 말은 곧 현실이 됩니다. 엘리사가 그 청년을 위해 기도하자 그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도 아침에 문을 열면 하루와 세상의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현실이라고 굳게 믿고 두려움 가운데 삽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 현실을 엄연히 인정하면서 그 현실너머 또 다른 현실이 있음을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바로 보이지 않은 현실세계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세계가 있음을 본문에서 엄연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가운데 어느 것이 현실입니까?
영안이 닫혀있는 사람은 보이는 세계만이 현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려 있는 사람은 보이는 세계도 현실임을 직시하고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사의 현실감각입니다. 눈이 열린 청년도 두 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두려움은 변하여 감당할 수 없는 기쁨과 담대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두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삶에 처한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직시하고 삽니다. 그러나 그 삶에 휘둘리거나 두려워하여 절망가운데 처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에는 또 다른 현실인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하심이 똑똑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눈을 갖은 자는 행복자입니다. 그 사람은 보이는 현실을 보이지 않는 현실이 이기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엘리사의 현실 감각 속에서 승리와 영광의 삶을 사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2014년 8월 3일 일요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련회

아름다운 사람들
개척하고 얼마 안되어 지난 늦 겨울에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 갑자기 연락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아름다운 수련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보통 수련회는 몇 개월 전에 연락이 되는데 두 주 앞두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으심을 믿고 순종하기로 했습니다주일예배와 모임을 마치고 약 네 시간을 운전하여 올라갔습니다. 눈이 많이 와서 설경이 아름다웠습니다. 새로 구입한 네비게이션이  말을 안들어 구 네비게이션을 이용했는데 잘 안내해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목사님께서 반갑게 맞이해 숙소로 안내를 해 주셨습니다. 짐을 풀고 집회 장소로 갔더니 원탁에 다섯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원래부터 소그룹을 좋아하는지라 얼마나 역사하실까 기대감이 증폭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오시려고 했던 분들이 일 때문에 못 오셨다며 미안해 했습니다. 그러나 온 천하보다 귀한 분들이 이렇게 한 원탁에 모였는데 얼마나 감사한지요. 어른 일곱명이 아이들 열 세명을 데리고 온 가족 수련회였습니다. 그 나마 두 분은 아이들을 섬기러 가셨습니다. 특히 부부가 계셨는데 아내의 말은 미국생활이 심심해서 교회에 나왔고, 또 심심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가자고 수련회를 핑계삼아 이곳에 오는 것을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 안 믿는 분이 목사님께 졸라서 놀게해 달라고 해서 수련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수 많은 수련회를 보았지만 이런 수련회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 강사로 부족한 종을 오라고 한 것입니다. 주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녹초가 되었지만 이상한 수련회가 오히려 열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때 부터 약 세 시간에 걸쳐 복음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선십을 자세히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한 후에 돌아가면서 간증을 했습니다. 알고보니 한국에서 학교 교사로 섬기다 오신 자매님, 젊은 감리교 여 목사님, 서울 의료원의 전문의로 가족과 함께 안식년 온 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의사 부부를 위해 수련회를 마련하셨던 것입니다. 자매님은 그 날 밤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심심해서 놀고 싶어 핑계삼아 수련회를 추진했던 분입니다. 남편은 대학교 시절 선교 단체에서 주님을 영접 한 후 이제까지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이번 수련회가 회복의 시간이 되었고 무엇보다 아내가 주님을 영접하게 되어 감사하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부터 화요일 정오까지 이 작은 원탁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의 잔치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자매님은 시간이 아깝다며 열정적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제 사역 가운데 주님을 영접한 후 그 다음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관통하여 들은 사람은 이 자매님이 처음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감동이 되어 피곤도 모르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한 분 한 분이 말씀을 통해 회복되고 새 힘을 얻은 세상에서 가장 작고 아름다운 수련회였습니다. 예수님 잘 믿으시라고 큰 절로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내내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예수님과 주님을 닮은 귀한 목사님, 성도들이 원탁에 둘러 앉아 있는 천국의 모습이 마음 깊이 새겨졌습니다.

최근에 목사님에게 소식이 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영접한 자매님이 세례를 받고 한국에 돌아가 교회에 잘 정착하여 예배드린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역시 예수님은 멋지십니다. 우리는 그저 순종하고 항아리의 아구까지 물을 채울 뿐입니다. 그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홀로 영광 받으소서! 아멘!                  
      말씀과 성령

2014년 6월 26일 목요일

영적 광합성

텃밭 영성
몇 년 전부터 아파트 배란다에 조그마한 화단을 만들고 몇 가지 채소들을 심었습니다. 키우는 재미가 솔솔하여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올 해는 게으름을 피우다가 사랑하는 형제로부터 몸에 좋다며 건네 준 신선초를 옮겨 심다보니 욕심을 내어 이것 저것 더 사다 심게 되었습니다. 노랑고추, 작은고추, 방울 토마도, 처음으로 가지도 심었습니다. 아침마다 굿모닝 인사를 하고 물을 줍니다. 몇 번씩 물을 나르며 흠뻑 적셔줄 때마다 송글 송글 물방울이 맺힌 잎사귀가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어느덧 아침마다 또 저녁마다 나도 모르게 이 녀석들과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나이 든 것이 틀림없습니다. 동물은 기쁨을 주지만 식물은 감동을 줍니다하루가 지나고 나면 조금씩 자라 생명의 경건함마저 가르쳐주는 스승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속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같은 동 1층에 사는 인도 분들이 똑같은 채소를 심어 났는데 우리 집 녀석들과 왜 그렇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무슨 정글에서 자라는 것처럼 쑥쑥 큽니다. 아내와 나는 그 녀석들이 연구 대상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출입할 때마다 그 녀석들이 눈에 거슬립니다. 종자가 다른 것도 아니고흙도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같은 홈디퍼에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물은 내가 더 열심히 주는 것 같은데 너무 차이가 납니다. 1층 녀석들을 보고 배란다에 나가보면 우리 텃밭의 녀석들이 더 작아 보입니다. 연구와 고민을 하던 중 어느 날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배란다에는 햇볕이 잘 듣지 않습니다. 그저 바깥쪽에 있는 녀석들에게만 잠깐 햇볕이 들고 안쪽에 있는 녀석들은 간접적으로 햇볕을 받을 뿐입니다. 그런데 1 층 녀석들은 해가 뜨면서부터 질 때까지 완전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광합성의 차이였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왔습니다. ‘배란다의 좋지 않은 텃밭 환경 속에서도 잘 자라주고 있는 거구나감사했습니다. 그 만큼이면 잘 자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미안했습니다. 햇볕도 제대로 쏘여주지 못하면서 비교만 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역시 스승입니다. 역시 비교의식은 감사를 질식시킵니다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단지 해를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둠을 물리치고 온 세계에 뻗어 나가는 햇빛에 비유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각 영혼에게 비쳐질 때 그들이 살고 자라며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제대로 쏘여주지 못하면서 자라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어떻게든 말씀에 완전히 노출되는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의 빛에 온전히 노출된 영적 광합성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만이 성도를 풍성히 살리는 목양의 가장 큰 기쁨이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2014년 5월 17일 토요일

"저울을 속이지 말라"

http//blog.daum.net/dropsof
오늘은 개척하여 새벽 기도를 시작한 이후로 가장 많이 모였다. 북쪽에 사는 성도들이 토요일에는 참여하기로 했다며 일찍 와 앉아 있었다. 한 자매는 새벽잠이 많다며 4시 45분에 모닝콜을 부탁하여 나왔다. 마치 마가의 다락방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하신 것과 같은 은혜의 시간이었다. 작은 아침 기도모임이지만 임재하심이 각자의 고백중에 넘쳤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권을 확립시켜 주신 후 다윗은 요나단과 언약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것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다. 묵상 중에 죽은 개와 같은 자라고 고백했던 므비보셋의 말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보여 주셨다. 다윗이 요나단과의 약속대로 그의 절름발이 아들을 왕의 탁자에 나와 날마다 밥상 공동체에 속하게 한 것이 은혜로 다가왔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아무 소망이 없던 우리, 참으로 죽은 개와 같이 썩어 갈 수 밖에 없는 죄인 중에 괴수인 나에게도 은총이 흘러오게 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것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새 언약 때문이다. 그 덕분에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가 왕의 초대를 받아 그의 식탁에서 날마다 교제하며 사는 은혜를 받은 것이다

말씀을 나눈 후에 둘러 앉은 성도들에게 최근에 주신 은혜를 나누자고 했다. 돌아가면서 은혜를 나누는 중에 한 성도의 간증이 감동이 되었다. 늘 죄책감 속에 머물러 있었는데 며칠 전 고린도후서 말씀을 읽으면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살아 역사 한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대속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이 말씀으로 울고 자유케 되었다는 고백이었다. 그러면서 예전에 경험한 삶을 나누었다

요크에 있는 가게에서 많은 경우 사람들이 물건을 훔치고 속여 가져가 하루에 몇 십불씩 손해를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스스로 보충하려고 어짜피 훔쳐가니 자신도 계산대 버튼을 더 두둘겨 수입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손해보지 않으려고 살았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성경을 읽게 되었다. 어느 날 성경 말씀 가운데 "저울을 속이지 말라"는 말씀이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말씀을 받고 한 달 동안 갈등을 했다고 한다. 당장 손해를 볼 것 같은데 하나님은 저울을 속이지 말라고 하셨다. 한 달 후 말씀대로 더 이상 계산기의 버튼을 두둘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나눔을 들으면서 우리 공동체가 진정한 예수의 제자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울을 속이지 말라고 하셨으면 하나님의 사람은 그대로 해야 한다. 만약 그 동안 잘못했으면 회개하고 고쳐야 한다. 그것이 말씀으로 사는 성도의 모습이다. 이렇게 말씀으로 사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는가? 이어진 간증은 그의 저울의 계산을 뛰어 넘어 예비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고백이었다.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 진 그의 삶이 제대로 통과된 것이다. 이어진 한 분 한 분의 나눔이 흘러넘칠 때 우리 공동체는 어느 덧 천국을 경험하고 있었다. “주님! 바로 이 맛이군요!” 

2014년 4월 29일 화요일

블러드 루트


Bloodroot
오랜 만에 화창한 봄 날씨에 아내와 함께 하이킹에 나섰습니다. 가끔 즐기는 코스인데 팝타스코 밸리에 있는 시내가 흐르는 아름다운 오솔길입니다. 오고 가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며 새롭게 돋아나는 나뭇잎과 새싹들을 보면서 마음이 설레기도 했습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는 어린시절 양평 문오리 외가댁 시냇가를 그립게 했습니다. 흔들다리를 건너 되돌아오는 길에 이름 모를 들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누가 심은 것도 아닌데 아름답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눈에 띈 꽃이 있습니다. 아홉개의 하얀 꽃잎과 노란 술이 조화를 이룬 깨끗하고 예쁜 꽃이었습니다. 줄기마다 하나씩 꽃받침 잎이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어 저장을 하였습니다. 얼마 후 조국에서 너무나 슬픈 일이 벌어졌고 꽃다운 나이에 떠나간 조국의 아들과 딸들의 비보가 들렸습니다. 카톡대문에 이름은 모르지만 그들처럼 청순한 하얀 꽃으로 그들을 추모하고 싶었습니다.

며칠 후 오랜 만에 한 자매님으로 부터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카톡 사진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 꽃 이름이 무엇인지 아냐고 물었습니다. 모른다고 했더니 블러드루트(Bloodroot)’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식물학을 전공한 자매라 너무 반가워하였습니다. 이 꽃은 봄에 잠깐 피고 지는데 뿌리가 붉고, 그 뿌리의 진액도 피처럼 붉다고 해서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름을 알고 보니 더욱 감동이 왔습니다. 고난 주간에 조국의 아들, 딸들의 비보를 들으면서 마음이 힘들었는데 잔잔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마침 그 기간에 요한계시록을 읽으며 천국간 성도들에게 흰옷을 입히신다는 말씀을 읽으며 은혜가 더했습니다. 블러드루트가 자신의 진액을 통해 생명의 줄기를 내고, 깨끗하고 청명한 하얀 꽃잎과 노란 술을 내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갑판까지 올라왔다 친구들을 구하러 다시 내려간 온유양이 생각났습니다. 순백한 블러드루트처럼 먼저 간 온유양과 이름 모를 친구들이 이젠 더이상 욕심도 없고, 슬픔도 없고, 미움도, 시기도 없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맑고 깨끗한 예쁜 천국의 꽃들로 살아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4년 3월 27일 목요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 : 복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복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복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늘 음식을 먹는데 사용하는 수저에도 한자로 복을 새겨 놓습니다. 아마 몸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복이 되라는 것일 것입니다. 베개 닢에도 복자를 새겨 놓습니다. 침상에 누워 있을 때도 복이 들어오길 원하는 것입니다. 대문에도 복자를 크게 붙여 놓습니다. 집안으로 복이 들어오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봄이 되면 입춘대길(立春大吉)이란 글귀를 대문에 붙입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복을 흔히 오복(五福)이라 합니다. 오복(五福)이란 말은 중국 고대 상서(尙書) 홍범편(洪範篇)에 맨 처음 기록 되어 있는 구절인데 옛 사람들이 인간의 행복에 대하여 정의해 놓은 고전적인 명언(名言)에 해당합니다. 오복(五福)은 수(), (),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 ()는 장수의 복입니다. ()는 물질과 재산의 복입니다. 강녕(康寧)은 몸과 마음의 건강의 복을 말합니다. 유호덕(攸好德)은 덕을 행하며 즐겨 행하는 복을 말합니다. 고종명(考終命)은 제 명대로 살다가 죽는 복입니다.

놀랍게도 성경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이 세상이 말하는 복과 좀 다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복이라는 단어는 베라카라는 말인데 축복의 근원’, ‘선물이란 의미입니다. 세상의 복은 사람에게 오는 것이요, 받는 것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복은 사람 자신을 복 자체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는 복이 될지라"(12:2)고 하십니다. 특히 베라카라는 단어의 어원은 바라크 라는 말인데 무릎을 꿇다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자가 바로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이 된 사람은 모든 삶이 복을 나누어 주는 근원이 되고,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귀한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은 오래 살아야 복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사명대로 살아야 복이라 하십니다. 세상은 재물이 많아야 복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정직하게 벌고 베풀고 나누는 삶이 복이라 하십니다. 세상은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복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생명자체가 복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제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 복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영생을 누리며 천국에 사는 것이 복이라 하십니다. 날마다 만 왕의 주되신 주님 앞에 무릎꿇음으로 진정한 복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2014년 3월 10일 월요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 : 의탁

지구 상에 존재하는 새의 종류는 무려 9,700여종이 된다고 합니다. 1990년까지만 해도 400여종 밖에 알지 못했는데 조류학자들의 관찰로 지금까지 밝혀진 새가 만 여 마리가 된다고 합니다. 온갖 종류의 다양한 새들이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알바트로스
뉴질랜드의 남섬 오타고 반도의 외진 곳에는 세상에게 가장 큰 새가 살고 있습니다그 새가 바로 알바트로스입니다. 알바트로스는 날개를 펴면 그 길이가 3,4m에 이릅니다. 알바트로스는 이륙과 착륙을 할 때 기우뚱 거리며 엉성한 모습을 보입니다. 아마도 날개가 너무 길어서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폭풍이 불면 알바트로스는 바람에 그 큰 날개를 맡기고 하늘 높이 올라 먹이를 찾아 무려 3,000 km나 날아갑니다. 모두 다 폭풍을 두려워 하지만 알바트로스 만은 오히려 폭풍을 기다립니다. 폭풍이 자신을 하늘 높이 오르게 하고, 가장 멀리 날게 하기 때문입니다. 알바트로스는 그 거센 바람을 타고 자유로운 비행을 하는 것입니다. 알바트로스는 10살이 되었을 때 짝짓기를 하고, 부부가 함께 70평생을 사랑하며 살다 80세에 죽는다고 합니다. 한 마리가 죽지 않는 이상 짝을 바꾸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보다 나은 새 입니다.  

알바트로스의 비행
예수님께서 이 새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그들을 먹이시고 기르신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요, 예술가요, 최고의 조련사이십니다. 예수님은 창공을 그들의 비행과 자유의 공간으로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아름다운 새들도 돌보시는데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너희를 돌보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생명을 주신 너희를 돌보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알바트로스가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폭풍에 자신의 몸을 맡겼을 때 하늘 높이 올라 세상 끝까지 날아 갈 수 있듯이 예수님은 성령의 바람으로 우리 인생을 가장 높은 곳인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이르러 자유와 평화의 두 날개로 영원토록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2014년 3월 3일 월요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 : 방패

메릴랜드 숲
메릴랜드에 매우 아름다운 길이 있습니다.자동차로 지나가는 로컬 길인데 풍광이 아름답고 작은 시냇물이 굽이 굽이 길을 따라 흐르는 곳입니다. 머리를 식히고 싶을때에 꼭 찾는 길입니다. 특히 온갖 무늬와 형형색색을 입은 가을 날에는 더욱 예쁜 동화속 길로 변하곤 합니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습니다. 밝은 햇빛이 숲 길 사이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커브 길을 돌자마자 우리 눈 앞에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습니다. 너구리 가족이 도로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모두 네 마리였습니다. 나란히 길을 건너는 너구리 가족이 갑자기 나타난 차를 보고 놀란 눈치였습니다. 그럼에도 서두르지 않고 여유있게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차를 세우며 세상에서 처음으로 너구리 가족의 여행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어미부터 차례로 건넌 후에 막내처럼 보이는 체구가 작은 너구리가 재촉하며 건넜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막내 너구리가 길을 건너자 마자 우리를 살짝 훔쳐보더니 자기 앞에 있는 나무 위로 살짝 점프에서 나무를 껴 안고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막내 너구리가 하는 짓이 너무 귀여워 한참동안 웃으며 바라 보았습니다. 제 딴에는 갑자기 나타난 괴상하고, 거대한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하려는 본능이 발동한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의 귀여움으로 적의 마음을 녹이는 놀라운 실력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찌 동물만 그렇게 자기 보호를 하려 하겠습니까? 사람의 본능 가운데 하나가 자기보호입니다. 자기보호(自己保護)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때때로 닥치는 사건들은 마치 거대한 자동차 앞에 막내 너구리처럼 본능적 자기보호로는 아무것도 보호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너의 방패요 상급이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주에서 가장 크신 분이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어 주시는 삶처럼 안전한 삶이 어디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왠지 모르게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두렵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하나님께서는 방패만 되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급도 되겠다고 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선물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행복자입니까?(*)


2014년 2월 28일 금요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 : 만남

사랑의 집
십수년 전에 성도들과 함께 중국 연길에 있는 애심원(愛心院)이라 불리우는 사랑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사랑의 집은 원장 내외분이 조선족 어린 고아들과 함께 사는 고아원이었습니다. 당시 건물은 숙소와 고아원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숙소는 기금이 생길때마다 지어서 몇 층으로 올렸는데 많은 방을 서로 연결하느라 마치 미로와 같이 꾸며져 있었습니다. 그 곳에 묶는 동안 목사님께서 간증을 해 주셨습니다. 그 간증 가운데 저에게 충격을 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날은 제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저는 똥목사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아니왜 목사님께서 자신을 똥목사라고 소개하실까?’참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제 가슴을 때렸습니다.저는 날마다 수십명의 고아들의 기저귀를 갈아 주는 똥목사입니다”.


순간 저의 마음에는 한없는 부끄러움과 동시에 감사함이 교차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 날까지도 금목사가 되려했습니다.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금목사가 되려고 했습니다. 고상하고 능력있는 큰 교회 목사가 되어 한국교회를 섬겨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목사로서 명성을 얻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목사님의 똥목사 소리에 큰 깨달음이 왔습니다. 저야말로 더럽고 냄새나는 진짜 똥목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회마저도 일신의 야망으로 삼고자 하는 저의 추하고 악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 냄새나고 더러운 똥목사였습니다. 저는 그 날부터 주님께 부족한 종도 똥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흉내라도 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똥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지 못해도 그렇게 가야만 한다고 채찍질하고 싶습니다. 누구도 돌보지 않는 가장 작은 소자들의 똥기저귀를 갈아주는 그 분이야말로 진짜 금목사였습니다. 그 분은 남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온전히 지고가는 진짜 예수의 제자였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감사한 만남이었습니다.    

-금목사 똥목사, 두 십자가 중에서-
   

2014년 2월 25일 화요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 : 웃음

웃음은 마음의 청명이다
예전에 한국에서 유행했던 코메디 중에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프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구봉서, 배삼용등 한국 코메디의 대부들이 큰 웃음을 주어 고단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많이 웃게 하였던 희극입니다. 웃음은 사람의 마음과 육신에 새로운 에너지를 일으키곤 합니다. 웃음은 그 자체가 위로입니다. 한 번은 서울에 있는 고아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옛 저택을 수리하여 고아원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수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각 방에 들어 섰을 때 보았던 장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방 안 구석 구석에 서 있던 장면입니다. 보통 아이들이라면 끼르륵, 끼르륵하면서 놀고, 뛰고, 웃고, 인사도 할터인데 그 방안에는 정적만 흘렀습니다. 아이들은 생기없이 그저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너무나 충격이 되어서 안내하는 분에게 물었습니다. 그 분의 말은 아이들이 이미 우리가 잠깐 왔다 갈 사람들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에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무 정을 많이 주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이 제 인생의 앨범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 일 것입니다.

웃음이 사라진 인생처럼 불행한 삶은 없습니다. 성경 인물 가운데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을 찾아 보기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99세가 될 때까지 자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75세 때에 자녀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무려 24년동안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모든 소망이 끊어졌는데 어찌 웃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98세 정도 되었을때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내년 이맘 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장막 뒤에서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88세된 여자가 어찌 아기를 갖을 수 있을까 하면서 웃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사라가 웃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라는 웃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시 하나님은 아니다 네가 웃었다고 하시면서 네가 반드시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웃음이라고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바로 이삭(Issac)입니다. 이삭의 뜻이 바로 웃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을 수 없는 삶에 진정한 웃음을 주신 분입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자는 진정한 웃음을 선물로 받는 자입니다.(*)


2014년 2월 22일 토요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 : 치유

얼마 전에 노스캐롤라이나 그린스보로의 작은 개척교회에서 성경금맥집회를 하였습니다. 집회 후에 샬롯에 있는 숙소까지 전도사님께서 라이드를 해 주셨습니다. 처음 뵙는 전도사님이었지만 최근에 자신에게 일어난 삶을 나누었는데 참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지거 쾨더 
전도사님은 한국의 유수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여 일하다가 소명을 받았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올 해 삼십 삼세 된 분이었습니다. 그는 작년 말에 한국에 나가 동갑의 자매와 선을 보았는데 여섯번 만나고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답니다. 꽃피는 봄이 되면 결혼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제하는 자매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이 자매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답니다. 졸지에 동생들을 키워야 하는 소녀 가장이 된 것입니다. 자매는 동생들을 키우며 여상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였고, 졸업 후에 다행히 좋은 직장에 취업이 되었습니다. 백 오십여명이 넘는 직원들 가운데서도 실적 1위에 오를 정도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동생들 학교 뒷바라지를 다 했습니다. 서울의 유수한 명문 사립대에서 교직원 선출을 할 때 접수를 하였습니다. 자격조건에 부족했지만 지원을 했습니다. 담당 교수께서 자매의 삶의 성실함을 보고 한 번 인터뷰의 기회를 주자고 제안하여 모든 교수들이  면접을 했는데 그녀를 뽑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도사님은 참으로 열심히 살아 온 자매의 삶에 감동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의 반려자가 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자매의 마음에는 늘 눌리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시부모님이 되실 분들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부모없이 자란 사람’이란 자격지심이 있었습니다. ‘내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 어떻게 반응하실까? 이것이 늘 걱정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의 가정은 부산이었고, 자매는 서울에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자매에게 걸려 왔습니다. 시어머니가 되실 분이었습니다.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에 자매는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그 한마디는 “수연아! 엄마다! 라는 외마디였습니다. 그토록 들어보고 싶었으나 들을 수 없었던 말이었습니다. 깊은 사랑과 배려와 위로의 이 한마디가 자매의 수십 년 간의 두려움과 외로움, 아픔과 상처를 모두 씻어 주었습니다. 얼마 후 부산에서 올라 온 시어머니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는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넸습니다. 그 봉투에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엄마가 수연이에게 주는 첫번째 용돈.” 자매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습니다. 어느 덧 캄캄해진 노스캐롤라이나 파크웨이를 달리며 이 아름답고 사랑스런 이야기는 제 마음마저 녹여 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룻과 나오미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깊은 사랑의 한 마디가 상처난 다음 세대를 치유하고도 남습니다. “수연아! 엄마다!(*) 



2014년 2월 21일 금요일

LWC 제자훈련 2단계 : 자녀의 길 (하나님의 자녀로서 SONSHIP 회복과 누림)


LWC DT 2
인간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장 큰 복은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추상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를 다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됨(SONSHIP)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 됨이 회복된 자들은 삶의 의미와 비전 그리고 죽음 이후의 영생의 문제까지도 다 해결 받음으로 진정한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쉽은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구원자 하나님의 자녀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었던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죄의 종으로 전락했다고 말씀합니다. 아버지를 떠나 홀로 사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곧 결핍과 고통을 의미합니다. 죄가 들어온 세상은 사망이 왕 노릇하여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얻고 살수가 없습니다. 좌절과 절망뿐입니다. 미움과 정죄에 삶을 삽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됨이 회복되면 전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2:20)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와 함께 사시는 하나님과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지난 20 여년 동안 SONSHIP 복음 제시를 할 때마다 얻은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큽니다. 많은 영혼들이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심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었고, 어떻게 그 자녀 됨을 상실했고, 그 상실의 결과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 자녀됨을 회복하여 살 수 있는지 전할 때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듣는 자마다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성령의 역사가 넘쳤습니다.

LWC DT 2
LWC DT 2
「자녀의 권세를 누리라」(도서출판 그리심) 를 출판한지 10년 만에 그동안 교회에서 은혜를 나누고 양육했던 교재「SONSHIP,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다」(쿰란출판사) 훈련생용과 지도자용을 출판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부족한 교재를 통해 아직 주님을 모르는 한 영혼이라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회복하고 ,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들이 건강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권기창목사는 본서에서 복음의 핵심을 명확히 파악하여 서술해가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든 문제와 그에 대한 해결을 '관계의 끈' '교제의 끈'으로 풀어나가는 시도는 탁월한 해법으로 여겨집니다- 김의환 추천의 글 중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성도들의 삶에 길잡이가 되고, 한국교회의 복음 제시에 새로운 지침이 될 수 있는 '자녀의 권세를 누리라'는 책을 펴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을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의미와 긍지 그리고 보람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 
박조준 추천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