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6일 토요일

한 해를 마무리 하며

2015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필름이 돌아가듯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스쳐갑니다. 많은 은혜와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배려요, 사랑임을 고백합니다. 아쉬움도 있었지만 은혜가 덮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우리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비전 중에 하나인 수직선교의 핵심인 식탁가정예배가 원형을 이루며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은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가장 귀한 사명을 무리를 제자 삼는 사역임을 고백해 왔고, 그렇게 섬기려 애써왔습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 방향성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늘 부모가 먼저 제자가 된 후 가정에서 자녀를 제자 삼는 수직선교에 대한 숙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믿음안에 있는데 자녀는 심각한 경우를 너무 많이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개척하게 하시면서 우리 공동체에 그 숙제의 성경적 해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기간 동안 특별히 올 한 해 제자훈련을 하면서 종은 참으로 감격과 기쁨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꿈이 현실이 되는 은혜를 경험하고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상황상 홀로 예배를 드릴 수 밖에 없는 분들이 예배를 드리며 받은 은혜가 너무도 놀랍게 고백되기 때문입니다. 결혼 후 수십년간 한번도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생각조차 못했던 아버지가 이제 홀로 예배를 시작하며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에 그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만납니다. 날마다 시간을 정하여 홀로 기도하며 승리하는 자매님도 예배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또한 부부가 함께 드리는 예배와 간증이 들려올 때 그 어떤 감사의 마음보다 종의 마음이 설레입니다. 가게에서 찬송을 다섯장이나 부르며 예배를 드리는 부부, 영적리더십을 회복하며 첫 예배를 인도한 남편, 평생의 기도의 응답을 가정예배로 회복받은 부부, 세 아들과 함께 애찬식의 감동과 말씀 나눔으로 기뻐하는 부부, 대학간 두 아들을 주일마다 픽업하여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 부부, 어린 자녀의 집중력과 상황에 맞춰 예배하는 부부, 틴에이저 자녀들과 부디끼면서도 함께 예배 가운데 승리하는 부부, 이제는 아이들도 셀에 함께 참여하여 말씀을 나누는 은혜가 자연스럽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지난 1년동안 한 주도 빠짐없이 예배에 승리한 가정. 이러한 소식들이 종의 귓전에 들려올 때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데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어떠하시겠습니까? 우리 공동체의 모든 가정이 이 시대의 예배자 아브라함과 같은 가정이 되는 그 날까지 이 은혜의 강물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복 있는 자는 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2015년 12월 12일 토요일

메리 크리스마스를 나눕시다

저는 하이웨이 보다는 파크웨이를 좋아합니다. 물론 하이웨이를 달리는 시원함도 만끽하지만 때때로 파크웨이를 달리며 얻는 평안함과 자연이 주는 친밀함이 눈과 마음을 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둠이 깔리고 로컬 길로 들어서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츄리를 해 놓은 것을 보면 하늘 나라 별들이  내려와 앉아 있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추수감사절이 끝나고 성탄을 맞이하는 마음들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감싸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믿음과 낭만을 깨어 냉냉하고 차가운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게 하는 일들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메리 크리스마스 보다는 ‘Happy Holidays’ 의 인사가 주를 이루는 분위기입니다. 혹자들은 특정 종교의 색채를 없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년 말을 만들자는 의미라고도 합니다. 특히 여러 인종과 민족의 종교적 절기도 있는데 유독 크리스마스만을 강조해 갈등을 유발시키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스타박스 커피 전문체인이 성탄 시즌 컵을 빨간 색으로만 디자인 해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흐름과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정으로 성탄을 축하하고 더 나아가 어린 아기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선포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당당히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인사하고 축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의 어원은 잘 아시다시피 “Merry Christ + Mass” 에서 온 것입니다. 곧 기쁨으로 이 땅에 오신 기름부음 받은 예수님을 예배하자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으로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어둠 가운데 오신 빛이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경배하며 예배하는 것이야 말로 성도의 본분이요,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교묘하게 우리로 하여금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것조차 못하게 하려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나름의 논리로 타당성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시대의 성도가 당하는 고난과 심지어 순교의 이유가 단 두가지입니다. 그것은 곧 말씀과 예수를 증거하는 것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순교할 각오를 하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쳐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세상의 분위기나 상황이나 위협과 상관없이 오직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당당히 메리 크리스마스로 인사하고 선포할 수 있는 자유를 마음껏 올 시즌에도 누리시고 나누시길 축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주님 이 땅에 오심을 감사합니다! 아멘!”

2015년 12월 10일 목요일

연말 연시를 맞이하는 마음

2015년도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지혜롭게 년 말을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개 - 먼저 새 해, 새 날을 맞이하기 위해 올 한 해의 삶과 마음을 돌아보며 묵은 죄들을 온전히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몸에 먼지가 묻으면 목욕을 하고 손 발을 씻어 정결하게 하듯이, 우리 삶과 마음과 말과 행동을 돌아보고 고백하여 하나님의 십자가 강가의 생수로 정결케 되기를 원합니다. 온전히 남은 기간동안 회개와 고백 가운데 나아가 영과 마음과 삶이 주님의 보혈로 깨끗케 됨으로 유쾌케 하시는 은혜로 새 해를 맞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복 - 주님께서는 하루의 삶 가운데서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4:26)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순간 분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마음에 품게 되어 지속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분을 품는 것이 바로 마귀가 들어오는 틈이 되고, 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날의 것은 해가 지기 전에 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쉼도 얻지 못하고 그 다음날까지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하루의 분도 이러한데 한 해의 분은 어떠하겠습니까? 새 해가 되기 전에 분과 화와 상처와 오해와 아픔을 십자가 안에서 회복하여 용서하고 용납하고 화해하므로 치유된 새 마음으로 새 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열정 -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로 뽑은 단어가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뽑은 단어가 바로 열정(passion)입니다. 매사에 열정이 있는 사람을 보면 존경심마저 듭니다. 회개와 회복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열정을 일으킵니다. 다시 시작하게 합니다.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희망을 가득차게 합니다. 청춘인데 노인처럼 사는 삶이 있고, 노인인데 청춘처럼 사는 삶이 있습니다. 열정은 우리를 영원한 청춘 으로 살게 합니다. 년 말을 맞이하면서 주님 앞에서의 진정한 회개와 회복을 통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열정을 선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크리스마스의 하나님의 열정이 그대로 새 해, 새 마음, 새 출발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매일의 감사로 살아갑시다!

추수감사절 다음날 밤을 지새우면서 맞이하는 블랙프라이데이는1년중 가장 대목을 보는 날입니다. 좀더 파격 할인된 상품을 사려고 목숨 걸고 기다리고, 몰려 들어가고, 다투는 인파를 볼 때마다 재미있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고 여러 마음이 혼재합니다. 매년 반복되는 대형매장 밖의 줄서기, 문이 열리면 앞 사람이 넘어졌음에도 밀고 들어오는 인파들, 생명과 부상의 위협 가운데서도 전진하여 가장 좋고 싼 물건을 차지 하려는 마음들이 우리네 현대인들의 단면을 절절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온 이 나라가 첫 추수감사절의 순수함이 어느새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에 젖어 들어 씁쓸한 마음도 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추수감사절 이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명쾌하게 알려 주고 계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 후5:18)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범사는 희로애락의 인생의 모든 순간 순간을 의미합니다. 기쁠 때나 노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언제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슬픈 일을 당하고, 노여움이 생길 때도 속히 그 마음을 십자가에 내려 놓고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인지라 기계처럼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을 감사로 고백하고 바꿀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어인이 찍혀 한달 동안 왕 외의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조서가 확정된 것을 알면서도 전에 하던 대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노린 대적들의 함정이었는데도 그 함정속으로 들어가면서도 감사한 것입니다. 위싱톤 스미소니언 미술관에 가면 중세 때 사자굴에 갇힌 다니엘을 그린 작품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깊이 묵상하며 큰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곧 범사에 감사한 다니엘은 절체절명의 위기 때도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매일의 감사가 위기 때도 감사케 하였고 그 감사는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막으시고, 온순하게 만드는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매일의 감사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위대한 삶을 누리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소금과 感謝

 
너희는 소금이라 하셨습니다.
소금은 맛이 납니다.
 
소금이 모든 맛들을 살아나게 합니다.
 
감사(感謝)는 소금과 같습니다.
감사는 맛이 있습니다.
감사는 우리 마음과 삶의 모든 맛을 살아나게 합니다.
우리 영혼에 하늘의 맛들을 소성(蘇成)시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감사는 감사자를 겸손하게 합니다.
 
감사는 듣는자를 유쾌하게 합니다.
 
감사는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울과 근심을 물리칩니다.
기쁨과 믿음을 살립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우리를 위함입니다.
 
감사로 은혜로 영광으로 살게 하심입니다.
모든 상황에 감사하면 주님이 다스리십니다.
 
 
 
 


은혜와 감사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 해가 참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순간 순간을 묵상하면 느림의 미학 가운데 천천히 흐르는 슬로우 라이프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순간이 일정한 분초로 시간이란 강을 이루어 쉼 없이 흘러갈 때 그것처럼 빠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활같이 빠르다고 했고, 우리가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의 강을 볼 수 있는 자, 그것을 자신의 선물로 붙잡을 수 있는 자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우리 날 계수함의 지혜를 간구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흘러가는 시간이기에 일상의 하루의 삶이 더욱 귀하고 소중 합니다. 시간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면 그 시간은 은혜로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습 니다. 시간 자체도 은혜지만 그 시간 안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개인의 출생과 자람 그리고 장성한 후의 모든 삶과 그 터전이 다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희노애락 조차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이미 우리의 생명조차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시간이 하나님의 편에서 모든 은혜의 향연이라면 우리 인간 편에서의 시간을 대하는 태도는 하나의 고백으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응하는 인간의 태도는 오로지 감사 밖에는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생명을 주심을, 가정을 주심을, 자녀를 주심을,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심을, 관계의 기쁨을 주심을, 모든 것이 은혜이기에 그저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시간의 역사를 은혜로 해석할 수 있는 자는 은혜를 누리는 자입니다. 그의 입에는 모든 것이 감사로 고백 되고 노래 되어 질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의 삶은 은혜가 더욱 은혜 되게 하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무르 익음의 한 해의 끝자락에 이렇게 모든 은혜를 돌아보며 또한 미래의 시간조차도 은혜로 앞당기며 감사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자는 행복자입니다. 이제 다음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드리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배가 되길 소원합니다.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 너희가 기쁘게 받으 심이 되도록 드릴지며 (22:29) 의 말씀처럼 온전한 감사로 우리 자신을 기쁘시게 받으시는 감사 주일이 되게 합시다. 이 놀라운 감사의 고백이 순간 순간마다 넘쳐 흐르길 축원합니다. 아멘.

십자가의 깊은 강가로 나아갑시다!

성경은 에스겔이 본 성전의 환상에 대해 말씀합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나와 흘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는 모습입니다. 측량하는 사람이 동쪽으로 나아가면 천 척씩 측량을 하는데 처음에는 물의 깊이가 발목에 오릅니다. 두번째 측량 때는 허리까지 오릅니다. 세번째 측량 때는 그 물이 가득하여 능히 건너지 못할 정도로 차 오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인자야 이것을 네가 보았느냐고 말씀하시며 그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에서부터 흘러내린 물이 강을 이루고,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고, 바다도 되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과실 류가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에서 흘러 내리는 물은 생명수를 말하고 그 생명수 강가가 모든 만물을 소생케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물로, 강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말씀이 흘러 넘치는 곳마다 모든 만물이 삽니다. 생명들이 살아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십자가의 복음이 되어 우주 만물에 흘러 넘칠 때 만물은 그 복음 안에서 복음의 능력으로 소생합니다. 곧 십자가의 깊은 생명의 강이 만물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또한 그 십자가의 깊은 강가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십자가의 강가로 인도하시고, 거기서 우리가 살며, 만물이 소생하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제자 삼음에 임하는 훈련은 바로 성전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깊은 강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강가에서 우리가 담겨지고 세례를 받아 옛아담은 죽고 예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남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일일 리트릿을 통해 십자가의 깊은 강가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깊이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맛볼 수 없었던 생명수를 마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짧지만 강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 감당할 수 없는 깊음의 자리에, 은혜의 자리에 여러분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 십자가의 깊은 강가를 거니십시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듣기를 원합니다. (*) 
*안나산 기도원 : 7910 Peters Rd. Frederick, MD 21704 / 2시 개회예배
-교제의 시간, 영화상영, 쉐어, 저녁만찬, 기도회-

사랑하며 살기에도 너무 짧은 삶입니다!

모세는 그의 유일한 시편에서 삶이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90)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참으로 세월이 빠릅니다. 화살이 날아가듯이 시간의 날개가 우리를 실어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올 해도 벌써 열 달이 지나고 이제 두 달이 남았습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1년이 지나갑니다. 그래도 올 해의 삶을 후회하기 이른 것은 아직도 두 달이나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며 받아주며 사랑을 회복하고 주님의 복의 통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간입니다.

사실 인생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의미를 찾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과의 관계도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 방황하며 보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기초요 통로인 십자가 앞에 무릎 꿇으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의 길이 보입니다. 벽이 열립니다. 참으로 그 사랑의 원천에서 흐르는 생명수로 우리가 먼저 흠뻑 잠기고 나면 저절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됩니다. 사실 이 두 수직적 수평적 사랑은 십자가 사랑으로만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십자가 사랑 안에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율법의 정신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사랑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사랑의 열매가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현대인은 사랑을 여러모양으로 변형시키려 하지만 성경의 사랑은 여전히 일관성을 갖습니다. 사랑은 오래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한 것입니다. 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례히 행치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임을 깨달으면 긍휼함이 생깁니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랑 안에서 성숙함의 승리를 통해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남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기꺼히 질수 있습니다.     

할로윈을 Holyween Night으로!

10 31일은 소위 할로윈 날(Halloween Day)이라 하여 미국 문화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할로윈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축제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특히 자녀들이 있는 가정은 이 날을 어떻게 지내야 할지 고민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할로윈의 기원을 알면 그리스도인들이 이 날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할로윈은 기원전 500여년전에 아일 랜드의 고대 켈트족이 마귀를 두려워하여 만들어낸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죽은 사람의 영혼이 곧 내세로 가지 않고 1년간 다른 사람이나 동물의 몸 속에 머무르다가 내세로 떠난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1031일에 누구에게 들어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날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10 31일이 여름의 끝 날이고, 11 1일부터 겨울이 시작된다고 믿었습니다. 태양을 숭배한 그들은 바로 그 날 태양의 힘이 약해져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기에 그 날이 되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자기에게 들어 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1년이 지나면 죽거나 병들거나 믿었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은 자의 영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악마나 마녀나 귀신, 해골의 형상으로 변장을 하고 화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할로윈이 유럽 이민자들에 의해 현대 미국 사회에서 크게 문화화 되어 이 시대에도 우리 주변의 집들을 보면 온갖 흉직한 장식들로 꾸민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교적 유래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대안을 제시해 주어 모든 날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지금부터 498년전 10 31일에 그 대안을 주셨습니다. 그 할로윈의 날을 거룩한 구별된 날로 바꾸어 주셨는데 그 날이 바로 마틴 루터를 통해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드신 날입니다. 바로 1517 10 31일 종교개혁의 날입니다. 이 종교개혁을 통해 우리의 삶이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예수로 모든 날들을 하나님이 주신 경건하고 복된 날들로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10 31일을 종교개혁의 날로 지키며 할로윈을 홀리윈으로 바꾸어 교회에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뻐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축제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도 할렐루야 밤으로 거룩하게 그날을 지내고자 준비를 했습니다. 자녀들과 함께 오셔서 주님 안에서 “Holyween Day”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     

첫 세례의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28:19,20)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입니다. 온 땅의 모든 민족에게 나가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는데 그 제자 삼음의 첫걸음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세례는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지만 물로 행하는 성례인데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난 구원받음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통하여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이 예수님 안에서 다시 살았음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증거함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반드시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자 곧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고백하지 않는 자는 세례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자는 이제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교인은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교회의 영적지도 하에 거룩한 성도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갖게 되고, 자신에게 주신 은사와 섬김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 삼음의 순서로 먼저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 공표한 첫걸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 그 이후에는 말씀과 기도로 자라가야 하고, 말씀을 지켜 행하는 순종의 삶으로 성숙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는 개척 이후 첫 세례식을 거행합니다. 은혜입니다. 세 분은 지난 5주간 세례교육을 받으며 진정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주와 구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분은 이미 자녀의 길, 제자의 길 훈련을 통해 말씀을 배우고 지켜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세례 받는 분들이 더욱 믿음의 진보와 주님을 닮아가는 삶,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어 주님을 증거하는 자들로 세워져 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 세례의 모든 영광을 우리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아멘.  

하늘의 기도로 풍성한 교회!

어제 특새 마지막 말씀을 선포한 후 엎드려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서 큰 위로와 확신을 주셨습니다. 1주년을 보내고 2주년을 향해 가는 첫주간을 무엇보다 기도로 드리게 하신 것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제 새벽 마무리 기도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2주년을 향한 하루 하루 더욱 기도에 힘쓰기를 바라시는 것이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바울 또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4:2)고 했는데 더욱 풍성한, 더욱 깊은 기도를 올려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두 종류의 기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이방인의 기도요, 하나는 성도의 기도입니다. 이방 인의 기도는 땅의 기도요 땅의 기도요, 성도의 기도는 하늘의 기도입니다. 그러면 땅의 기도와 하늘의 기도가 어떻게 다릅니까? 땅의 기도는 모든 기도의 중심축이 자기 자신입니다.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돕니다. 전형적인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심저에 깔려있고 거기에 온갖 부귀와 건강과 명예와 땅의 것들로 가득 차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기도는 다릅니다. 먼저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그 분 만을 높입니다. 아버지가 모든 기도의 중심축이 되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질서를 찾도록 간구합니다. 곧 그의 다스림, 그의 나라,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통치가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땅에서 곧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땅의 기도가 아닌 하늘의 기도를 올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도를 올리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기도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곧 기도의 내용이 신앙의 수준입니다. 가장 어울리지 않고 잘못된 모습이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땅의 기도만을 올리는 것입니다. 땅의 기도는 아무리 오랜시간 기도한다 할지라도, 아무리 밤을 새워 기도한다 할지라도, 아무리 금식하며 기도한다 할지라도 아버지께서 들어 주실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중심적인 땅의 기도를 들어주면 그의 신앙의 패턴이 그렇게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응답이 곧 저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하셨습니다.(4:2,3) 그러나 하늘의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입니다. 전도의 문이 열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게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 응답하시는 하늘의 기도로 풍성한 새벽기도, 금요기도, 가정기도, 셀기도, 개인기도로 만들어 갑시다. 우리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물을 아구까지 채울 수는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듣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내일 새벽 5:30분에 만납시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46:5b),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57:8) 새벽은 하루의 첫 시간이요, 시작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이 첫시간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루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은 홍해요 뒤에는 바로의 애굽 군대가 추격해와 사면초가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새벽에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새도록 큰 동풍이 불게 하셔서 바닷물이 물러 가게 하셨고 새벽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건너가게 하신 것입니다. (14:21) 예수님께서도 새벽 미명에 겟세마네 동산에 나아가셔서 기도하셨는데 습관을 따라 행하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여러 습관을 갖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밤새도록 세상 것에 취해 사는 습관을 갖은 사람도 있습니다.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지 세 살 때 버릇이 여든을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 번 우리 마음과 몸에 베인 습관을 새롭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생각보다 쉽게 변화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제 예수 믿는 우리는 영육간에 거룩한 습관으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새벽을 깨워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습관처럼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남들이 다 깊은 잠에 빠져 있지만 동이 트기 전 새벽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는 행복자요,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거룩한 습관은 먼저 마음의 결단이 절실합니다. 기도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거룩한 목적을 갖고 도전하고 도전할 때, 그 반복이 계속되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곧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교회 설립 1주년을 맞이하면서 무엇보다도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몸 된 교회의 머리시요,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내어 드리고 앞서 행하시는 주님께 앞으로 1년을 또 내어 드리기를 소원합니다. 내일 새벽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6일동안 우리 공동체 모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시다. 부득불 그 시간에 출근하셔야 하는 분들은 차 안에서, 일터에서 함께 기도합시다. 감사의 기도로 지난 1년의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소망과 확신의 기도로 다가올 1년과 새 날들을 올려 드립시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교회, 감사로 새벽을 깨우는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해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4:13) 할렐루야! 아멘!

특별새벽집회로 2주년을 향해 출발합시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지난 1년동안 임마누엘로 함께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설립 1주년을 맞이하면서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어떤 행사 보다도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욱 귀한 것임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히 감사하는 마음과 헌신 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교회를 세우시고 인도하시는 주님 앞에 가장 합당한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0 4일 설립 1주년 주일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 주간 특새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길 원합니다.

먼저는 지난 1년동안 만세 전에 예비하신 교회를 세우시고 오늘까지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리길 원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100교회가 개척되면 1교회만이 생존하는 개척 1%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인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교회가 부족하고 연약한 가운데서도 오늘까지 이렇게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고백하면서 겸비함으로 감사를 드리기 원합니다. 둘째는 무릎으로 2주년의 첫걸음을 내딛기 원합니다. 오직 기도만이, 오직 엎드림만이 교회를 세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배목사님들의 말씀이 목회는 무릎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난 1년동안 절실히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역시 그 말씀입니다. 부족한 종은 2주년을 향한 여정 내내 오직 무릎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 새벽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어 오직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성도의 가정과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주님께 올려드릴 것입니다. 1년 내내 새벽기도를 하기는 어렵지만 새롭게 출발하는 한 주간은 꼭 함께 나오셔서 기도로 동역하는 은혜가 넘치길 소원합니다. 개인의 기도도 중요하지만 공동체 차원의 기도는 또 다른 역사와 응답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일찍 출근하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한 조찬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전날 일찍 주무시고 함께 나오셔서 뜨겁게 기도하고, 조찬 후 출근하시길 바랍니다. 기도로 시작하는 새로운 출발에 우리 모두 새마음, 새결단으로 주님과 동행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할렐루야!       

설립 감사 주일 1주년이 다가옵니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우리교회가 준비기간을 거쳐 지난해 10월 첫째 주일에 설립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두 주 후면 벌써 1주년이 됩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부족하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께 감사를 드릴 것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입니다. 요즘도 새벽마다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지난 1년 동안 주신 강력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1년 내내 부족한 종을 붙잡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말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의 힘줄을 끊으라 는 말씀입니다.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하십니다.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에게도, 나라를 지키는 다윗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말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의 힘은 굉장한 유혹입니다. 여호수아에게는 정복한 말의 힘줄을 다 끊으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적에 게서 빼앗은 말 천 마리중 구백마리의 뒷 힘줄을 끊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권세도, 힘도, 파워도 의지하지 않겠다는 결단이요, 실천입니다. 지난 1년 내내 새벽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실천케 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목회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하라 하심입니다. 바울 또한 의지할 것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자랑할 것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힘을 뺏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과 가시에 짓눌 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내가 바로 너의 그 연약함에 머물러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에 능력으로 머물러 계신 주님을 보았고, 그 곳이 바로 바울의 모든 삶과 사역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제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 1주년을 맞이하고 새로운 날들을 영광 가운데 믿음으로 도전하기 원합니다. 오직 우리 공동체의 힘이 되신 주님의 은혜만이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시길 소원합니다. 아멘.     

계속 무리에서 제자로 나아갑시다

오늘부터 하반기 제자훈련이 시작됩니다.  신앙생활에는 종류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에 교회와 성경과 하나님을 맞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삶의 모든 것을 맞추는 것입니다. 전자를 자기중심적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후자를 하나님 중심적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과연 어떤 신앙이 옳은 것일까요? 이론적으로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의 삶에서는 전자의 행태를 보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신앙이 처음부터 하나님 중심으로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리입니다. 무리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관심에 따라, 경험에 따라 예수를 따라오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시작이 그렇다고 세월이 가고 시간이 가는데도 그렇게 살면 여전이 우리는 값싼 기독교인의 테두리를 벗어 나지 못할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리에서 제자로 변화되는 원리와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바로 이번주부터 시작되는 제자훈련이 통로입니다. 교회의 방향은 단순합니다. 무리에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상 무리로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드리고, 훈련에 임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댓가없는 제자됨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태어나는 것이지만 제자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겉모습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아담을 죽이고 예수님이 살아 역사하는 아사즉 생주 타생 (我死即 生主 他生) 제자도를 갖게 하는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은 생명전환의 변화과정입니다. 근본의 변화요, 방향의 대전환입니다. 이것이 바로 날마다 무리에서 제자로 나아가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도입니다. 영광스런 훈련으로 진정한 사역자가 되어 수직선교, 수평선교에 헌신하여 그의 나라를 섬기는 자들이 시대가 기다리는 제자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