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3일 금요일

"목사님! 변하지 마세요!"

 
Peter is changed
개척 첫 예배를 드린후 지난 1년 동안 가장 많이 듣은 말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목사님! 행복합니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목사님! 변하지 마세요”라는 말입니다. 개척을 해보니 마냥 축하 받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교회를 진정으로 세워 주시기를 구하기에 진중한 마음이 더 들어 조심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더 많이 듣는 말이 "목사님! 변하지 마세요" 라는 성도님들의 당부입니다. 그 말이 그냥 당부가 아니라 많은 눈물과 아픔속에서 간곡하게 나오는 말임을 알기에 더욱 깊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어느 날 등록한 성도님 가정에 심방을 갔는데 어머니가 교회가 좋고 은혜가 있어 회복이 되어 좋다고 하니 함께 나오는 아들이“권 목사님도 변할수 있어”라고 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면서 꼭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합니다.
 
우리 성도님 중에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제발 변하지 말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얼마 전에는 한인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미국교회를 다니다가 저희 교회 소식을 듣고 오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도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성도님들의 “목사님 변하지 마세요” 라는 말이 늘 마음 한 켠에 남아 있습니다. 그 말을  계속해서 마음 깊이 남겨 두고 싶습니다. 그 한 마디가 바로 주님의 음성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종도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기에 변할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어떤 분은 이미 변했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개척한 후 처음 걷는 길이니 때로는 외롭게 기도하며 홀로 결정하고 추진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또한 여러가지 복잡한 사안들이 다가왔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주춤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소리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기도하며 묵묵히 함께 하시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새벽 말씀에도 솔로몬이 하늘의 지혜와 세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부귀와 영광을 다 가졌지만 그도 변했습니다. 부패한 인간의 죄성 위에 온갖 복을 받으면 좋을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복이 독으로 바뀔 가능성이 많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다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이 문제는 해결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아담이 죽고 예수님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했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싸움이 변하느냐? 변치 않느냐? 의 영적 싸움의 결정판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싸움을 제대로 하면 그 심령이 제대로 변화됩니다. 아담의 욕구를 물리치고 예수님의 선한 욕구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종의 소원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변하고 싶습니다. 제대로 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에게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갈수록 오히려 “목사가 제대로 변했구나”하는 위로 한마디를 내 뱉을 수 있도록 섬기고 싶습니다. 그 길은 오늘 이 순간도 내 속에 아담을 죽이고 예수님으로 사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인생의 골인지점에 서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만날 때까지 진정 그렇게 살고, 그렇게 목양하다 가고 싶습니다. 부족한 종이 세월이 갈수록 진정으로 변화되어 주님을 닮아 가도록 그렇게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함께 다같이 그렇게 변화되길 기도합니다. '오 주여! 이 종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사 진정으로 제대로 변화되는 목사가 되게하소서!' 아멘.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말의 힘줄을 끊어라!"

말의 힘줄은 파워를 의미한다
최근 새벽기도 말씀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다. 늘 은혜를 주시는 말씀들이지만 특히 심령 깊이 확신으로 다가온 말씀이다.

역대상 18장 6절의 말씀인데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동일한 말씀이 13절에 또 한번 나온다. 한 장의 본문에 이처럼 두 번이나 반복되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다윗의 승리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좀더 자세히 보면 6절은 북쪽으로 나갈때고, 13절은 남쪽으로 나갈때다. 곧 사방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승리를 안겨주신 것이다. 물론 이 승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다윗의 언약으로 이어가시며 그 약속대로 역사하심이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처럼 사람이 꺽을 수가 없다. 하나님 앞에는 대적이 없다. 그러면 왜 다윗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기 때문이지만 다윗편에서는 무엇을 하였는가?

이전에는 이 말씀의 앞 구절이 눈에 안들어 왔었다. 그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는 승리의 구절만 들어왔다. 목사의 눈으로도 내가 보고 싶은 구절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새벽묵상에서는 달랐다. 앞의 3,4절이 크게 다가왔다. 소바 왕 하닷에셀과 다윗의 하맛에서의 싸움 사건이다. 이 전쟁에서 다윗은 소바 왕에게서 병거 천대를 빼앗는 승리를 거둔다. 그런데 다윗이 승리 후에 이상한 일을 행한다. 곧 병거를 끄는 말 가운데 백필만 남겨두고 구백필의 발의 힘줄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상식적이지가 않다. 천필의 병거면 얼마나 나라에 힘이 되겠는가? 얼마든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다. 그런데 90%를 버린다. 다 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다윗이 왜 이렇게 행했을까?

묵상은 폭포수처럼 은혜를 부어준다. 다윗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왕을 달라고 하면 왕은 세가지는 하지 말고 한가지는 반드시 행하라고 하셨다. 그 중 하나가 병거를 많이 갖지 않는 것이다. 왜 병거를 많이 갖지 말라고 하셨는가?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의 병거요, 힘이시요, 능력이 되시기 때문이다. 만약 왕이 병거를 많이 소유하고 더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보다 군사력을 힘으로 삼는 증거가 된다. 세상은 그렇다. 힘을 추구한다. 권력을 의지한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다르다. 오직 하나님만이 힘이시다. 다윗은 바로 이 말씀을 간파하고 90%의 말의 힘줄을 끊어 버린다. 그의 고백이 무엇인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이처럼 힘이 되신 하나님과 말의 힘이 어찌 비교 될 수나 있겠는가? 그러니 다윗의 믿음의 결단을 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오늘날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믿음의 사람이다.믿음은 무엇인가? 말의 힘줄을 끊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으로 삼았던 것,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것,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자리잡고 왕노릇하려는 것, 많은 경우 그것은 우리 자아요, 사람이요, 물질이요, 야망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힘줄처럼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들을 끊어내지 않고는 결코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 할 수가 없다. 믿음이 무엇인가? 내가 의지하던 것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작지만 실제적인 끊음의 결단은 어디로 가든지 승리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누리게 한다. 지금 이 순간 성령께서 끊어야 할 것을 깨닫게 하시는가? 당신이 하나님보다 더욱 붙들고 있는 것이 있는가? 지금 끊어라! 그러면 비로소 경험하게 될 것이다. (*)


2014년 10월 27일 월요일

"도고 기도"

임재하시는 하나님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면서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어떤 특정한 사람의 것이 아닌 모든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열쇠를 잘 사용하는 사람은 하늘의 보고를 받아 누리고, 그 열쇠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의 보고를 닫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선물을 다 받아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임하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우리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고 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두 손은 놀랍게도 한 손은 하나님의 보좌를 붙잡고 다른 한 손은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의 어깨를 붙잡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소와 시간과 상관없이 우리는 기도의 영적네트워크로 서로를 도울 수 있습니다. 사실 남을 위해 하는 기도를 그동안 중보기도로 지칭해 왔습니다. 그러나 중보기도는 오직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mediator)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보좌 우편에서 이 땅의 자기 백성을 위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모르고 사용해서도 안되는 것이지만 알고 그렇게 계속 사용하는 것은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중보기도자입니다” 라고 하면 예수님 자리를 빼앗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고 겸손한 사람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성경적 용어를 제대로 사용해야만 제대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성경대로 중보기도는 예수님이 하시는 기도로 정리해 드립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위해하는 기도를 무엇이라 칭해야 합니까? 성경에서는 도고 기도라고 합니다.  '도고'는 헬라어로 '엔튜크세이스' 라고 합니다. 딤전 2:1, 딤전 4:5 절에 나옵니다. 그 뜻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기도,탄원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도고(禱告:intercession)는 ‘이웃을 위한 기도’(Prayer to God for Neighbor:NIV) 입니다. 반면에 딤전 2:5에서 '중보'라는 헬라어는 '메시테스'입니다. 이 말의 뜻은 계약을 맺기 위해 두 사람 사이를 중보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곧 예수님의 중보적 사역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에 걸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 누구도 중보자가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새언약의 중보자가 되신다(히9:15)는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감히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중보자라고 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고와 중보라는 말의 헬라어 원뜻이 다름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드리는 기도를 중보기도라 하는 것이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도고기도라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욱 예수님의 중보기도와 성도간의 도고기도로 더욱 강건하게 세워져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귀하게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우리 LWC 안에 새롭게 도고기도사역(담당 황희순 권사)이 열릴 것입니다. 도고기도에 겸손함과 열정으로 참여하여 주님 나라와 교회와 성도를 위해 도고하는 역사가 넘치길 소원합니다.(*)


2014년 10월 1일 수요일

설립감사예배, 주님께 영광올립니다!

KM 주일2부 예배
예수님의 생명값으로 세우신 교회가 오늘날 이 땅에 세워질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물론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말씀으로 사는 교회의 비전은 교회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이 땅에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주시도록 간구하고 그것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세우시려 한 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현이요, 브랜치입니다. 이 땅에 성도는 교회공동체로 하나가 되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다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로 편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교회는 그 나라를 대망하고 사모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에 우리 공동체가 설립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이 주신 선물 중에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받아 누리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지난 2월9일에 첫예배를 드릴 때가 기억납니다. 벌써 오래된 역사 같습니다. 이제 8개월이 지나 이처럼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교회를 세워가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리는 예배를 드리게 되어 참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이제 막 예수님의 생명으로 태어난 우리 말씀으로 사는 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워져 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참으로 주님 앞에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설립감사예배는 우리 공동체의 축제의 날입니다. 이 날은 외부의 손님들도 초대하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에 대해 함께 감사하고 함께 기뻐하는 날입니다. 특히 10월 첫째주일로 설립기념주일을 정한 것은 우리 영어 교회인 CCC가 바로 3년전 10월 첫 주부터 예배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인교회 역사상 하나님께서 EM이 KM의 개척을 돕는 초유의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선물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독특한 정체성입니다. 대부분의 한인교회의 역사는 KM이 먼저 교회를 세우고 필요에 따라 EM이 세워지는 현실이다 보니 EM을 단지 한 부서나 자녀들의 모임정도로만 인식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다르게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한 몸에 양팔이 있듯이 CCC와 LWC는 건강한 한 몸의 지체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신 이 역사에 감사하며 제자도와 말씀과 성령으로 온전히 무장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의 교회는 여전히 전투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대적 사명인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밖에 있는 비진리와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며 주님의 날을 준비하고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해야 합니다. 이 첫걸음부터 놀랍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주님의 몸이 되길 소원합니다. (*)


2014년 9월 3일 수요일

엘리사의 현실감각


새벽성경강해를 통해 개인적으로 받는 은혜가 큽니다. 평생 새벽성경강해의 꿈이 이제 실현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은 엘리사의 현실감각에 큰 은혜를 받고 새벽묵상을 짧은 글로 함께 나눕니다.
 
아람 왕이 번번히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려 작전을 세우고 진을 쳐 기다려도 어떻게 된 것인지 이스라엘은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아람 왕이 침상에서 하는 생각까지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람 왕은 도단성읍에 머무르고 있는 엘리사를 잡으러 군대를 보냅니다. 아침에 문을 열고 밖에 아람 군대가 포위한 것을 본 사환은 엘리사에게 어찌하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습니다. 그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이 말은 곧 현실이 됩니다. 엘리사가 그 청년을 위해 기도하자 그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도 아침에 문을 열면 하루와 세상의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현실이라고 굳게 믿고 두려움 가운데 삽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 현실을 엄연히 인정하면서 그 현실너머 또 다른 현실이 있음을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바로 보이지 않은 현실세계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세계가 있음을 본문에서 엄연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가운데 어느 것이 현실입니까?
영안이 닫혀있는 사람은 보이는 세계만이 현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려 있는 사람은 보이는 세계도 현실임을 직시하고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사의 현실감각입니다. 눈이 열린 청년도 두 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두려움은 변하여 감당할 수 없는 기쁨과 담대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두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삶에 처한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직시하고 삽니다. 그러나 그 삶에 휘둘리거나 두려워하여 절망가운데 처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에는 또 다른 현실인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하심이 똑똑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눈을 갖은 자는 행복자입니다. 그 사람은 보이는 현실을 보이지 않는 현실이 이기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엘리사의 현실 감각 속에서 승리와 영광의 삶을 사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2014년 8월 3일 일요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련회

아름다운 사람들
개척하고 얼마 안되어 지난 늦 겨울에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 갑자기 연락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아름다운 수련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보통 수련회는 몇 개월 전에 연락이 되는데 두 주 앞두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으심을 믿고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주일예배와 모임을 마치고 약 네 시간을 운전하여 올라갔습니다. 눈이 많이 와서 설경이 아름다웠습니다. 새로 구입한 네비게이션이  말을 안들어 구 네비게이션을 이용했는데 잘 안내해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목사님께서 반갑게 맞이해 숙소로 안내를 해 주셨습니다. 짐을 풀고 집회 장소로 갔더니 원탁에 다섯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원래부터 소그룹을 좋아하는지라 얼마나 역사하실까 기대감이 증폭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오시려고 했던 분들이 일 때문에 못 오셨다며 미안해 했습니다. 그러나 온 천하보다 귀한 분들이 이렇게 한 원탁에 모였는데 얼마나 감사한지요. 어른 일곱명이 아이들 열 세명을 데리고 온 가족 수련회였습니다. 그 나마 두 분은 아이들을 섬기러 가셨습니다. 특히 부부가 계셨는데 아내의 말은 미국생활이 심심해서 교회에 나왔고, 또 심심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가자고 수련회를 핑계삼아 이곳에 오는 것을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 안 믿는 분이 목사님께 졸라서 놀게해 달라고 해서 수련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수 많은 수련회를 보았지만 이런 수련회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 강사로 부족한 종을 오라고 한 것입니다. 주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녹초가 되었지만 이상한 수련회가 오히려 열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때 부터 약 세 시간에 걸쳐 복음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선십을 자세히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한 후에 돌아가면서 간증을 했습니다. 알고보니 한국에서 학교 교사로 섬기다 오신 자매님, 젊은 감리교 여 목사님, 서울 의료원의 전문의로 가족과 함께 안식년 온 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의사 부부를 위해 수련회를 마련하셨던 것입니다. 자매님은 그 날 밤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심심해서 놀고 싶어 핑계삼아 수련회를 추진했던 분입니다. 남편은 대학교 시절 선교 단체에서 주님을 영접 한 후 이제까지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이번 수련회가 회복의 시간이 되었고 무엇보다 아내가 주님을 영접하게 되어 감사하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부터 화요일 정오까지 이 작은 원탁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의 잔치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자매님은 시간이 아깝다며 열정적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제 사역 가운데 주님을 영접한 후 그 다음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관통하여 들은 사람은 이 자매님이 처음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감동이 되어 피곤도 모르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한 분 한 분이 말씀을 통해 회복되고 새 힘을 얻은 세상에서 가장 작고 아름다운 수련회였습니다. 예수님 잘 믿으시라고 큰 절로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내내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예수님과 주님을 닮은 귀한 목사님, 성도들이 원탁에 둘러 앉아 있는 천국의 모습이 마음 깊이 새겨졌습니다.

최근에 목사님에게 소식이 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영접한 자매님이 세례를 받고 한국에 돌아가 교회에 잘 정착하여 예배드린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역시 예수님은 멋지십니다. 우리는 그저 순종하고 항아리의 아구까지 물을 채울 뿐입니다. 그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홀로 영광 받으소서! 아멘!                  
      말씀과 성령

2014년 6월 26일 목요일

영적 광합성

텃밭 영성
몇 년 전부터 아파트 배란다에 조그마한 화단을 만들고 몇 가지 채소들을 심었습니다. 키우는 재미가 솔솔하여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올 해는 게으름을 피우다가 사랑하는 형제로부터 몸에 좋다며 건네 준 신선초를 옮겨 심다보니 욕심을 내어 이것 저것 더 사다 심게 되었습니다. 노랑고추, 작은고추, 방울 토마도, 처음으로 가지도 심었습니다. 아침마다 굿모닝 인사를 하고 물을 줍니다. 몇 번씩 물을 나르며 흠뻑 적셔줄 때마다 송글 송글 물방울이 맺힌 잎사귀가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어느덧 아침마다 또 저녁마다 나도 모르게 이 녀석들과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나이 든 것이 틀림없습니다. 동물은 기쁨을 주지만 식물은 감동을 줍니다. 하루가 지나고 나면 조금씩 자라 생명의 경건함마저 가르쳐주는 스승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속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같은 동 1층에 사는 인도 분들이 똑같은 채소를 심어 났는데 우리 집 녀석들과 왜 그렇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무슨 정글에서 자라는 것처럼 쑥쑥 큽니다. 아내와 나는 그 녀석들이 연구 대상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출입할 때마다 그 녀석들이 눈에 거슬립니다. 종자가 다른 것도 아니고, 흙도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같은 홈디퍼에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물은 내가 더 열심히 주는 것 같은데 너무 차이가 납니다. 1층 녀석들을 보고 배란다에 나가보면 우리 텃밭의 녀석들이 더 작아 보입니다. 연구와 고민을 하던 중 어느 날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배란다에는 햇볕이 잘 듣지 않습니다. 그저 바깥쪽에 있는 녀석들에게만 잠깐 햇볕이 들고 안쪽에 있는 녀석들은 간접적으로 햇볕을 받을 뿐입니다. 그런데 1 층 녀석들은 해가 뜨면서부터 질 때까지 완전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광합성의 차이였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왔습니다. ‘배란다의 좋지 않은 텃밭 환경 속에서도 잘 자라주고 있는 거구나’ 감사했습니다. 그 만큼이면 잘 자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미안했습니다. 햇볕도 제대로 쏘여주지 못하면서 비교만 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역시 스승입니다. 역시 비교의식은 감사를 질식시킵니다.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단지 해를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둠을 물리치고 온 세계에 뻗어 나가는 햇빛에 비유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각 영혼에게 비쳐질 때 그들이 살고 자라며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제대로 쏘여주지 못하면서 자라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어떻게든 말씀에 완전히 노출되는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의 빛에 온전히 노출된 영적 광합성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만이 성도를 풍성히 살리는 목양의 가장 큰 기쁨이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