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10일 목요일

주여, 이 땅을 불쌍히 여기소서!

지난주 금요일. 2015년 6월 26일. 이 날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의 길로 기울기 시작한 수치스러운 날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연방대법원 판사들이 동성결혼에 대해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판결을 하도록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5:4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여 이제 미국 50개주 에서 모두 동성결혼을 합법화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5명이 미국의 역사를 법적으로 벼랑 끝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더욱 악은 악으로, 죄는 죄로 더욱 치달을 것입니다. 이번 판결은 이 세대가 마지막 시대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보도에 의하면 1996년 갤럽조사에서 미국인들의 동성결혼 지지여론은 27%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달 조사에서는 60%가 찬성을 했습니다.  버락 오바마는 이번 판결직후 “이번 대법원 판결은 미국인들의 승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이번 판결로 더욱 힘을 얻어 이제 우리의 다음세대의 후손들은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곧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될 것이고, 우리의 자녀들은 롯처럼 그 한 가운데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마지막 때를 노아의 때와 롯의 때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성도는 어떻게 대처하고 살아가야 합니까? 성도는 먼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 가고 있는지 두 눈을 뜨고 바라보며 진리로 무장해야만 합니다. 영적 전쟁의 한 복판에 들어가고 있음을 알고 우리의 믿음을 추스리고, 생명을 다해 진리를 지키며 복음을 위해 살아야만 합니다. 성경은 마지막때에 악은 악으로 치닫고, 복음은 땅끝까지 전파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두 평행선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우리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번 판결로 낙심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더욱 성도답게 진리와 사랑안에서 살며 저들의 영혼과 삶을 불쌍히 여기고 눈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특별히 식탁가정예배를 통해 우리 아이들을 온전히 복음과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온 땅에 전파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배교하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는 자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이번 요한계시록 특강을 통해 더욱 무장하고 깨어 기도하여 이 마지막 시대를 넉넉히 승리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됩시다.        

2015년 8월 24일 월요일

하나님 나라의 동역의 기쁨

얼마 전 뉴저지 복음으로 사는 교회 김세중 목사님으로 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여름에 볼티모어 이너시티 사역을 하는 김봉수 목사님과 동역하기 위해 뉴저지에서 유스그룹 형제 자매들이 오는데 묵을 숙소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교회 수평선교의 이너시티 사역과 같은 비전중 하나라 수평선교부장 집사님과 의논을 했습니다. 본인 집에서 머물게 하려고 했는데 정확한 일정을 알고보니 본인 가정이 이미 아웃 오브 타운이 예약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한 집사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흔케히 응답을 하셔서 숙소가 해결되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사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자매님들이 식사를 자원해서 준비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몇몇 자매님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들여 헌신해 주셨습니다. 아침 식사를 잘 준비해 주셨고, 점심은 도시락으로 그리고 저녁 식사도 잘 준비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6,7명이 온다고 했는데 선교붐이 일어나 12명이나 내려왔습니다. 화요일 이곳에 도착한 이너시티 단기 선교팀은 곧 바로 엘리콧시티 롯데 앞에서 선교 펀드를 위한 찬양과 기도회를 하므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번에 이너시티 사역은 지난 볼티모어 사태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라 더 의미가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교회가 해야 할 일을 뉴저지에서 유스 그룹 친구들이 와서 한다니 부끄러웠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우리 교회 유스 한 형제도 3박 4일동안 그들과 합류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볼티모어 시티의 홈리스들을 섬기고, 흑인 어린 아이들 방과후 학교를 운영하여 복음과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저녁에 교회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데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참으로 사랑스러웠습니다. 익히 김세중 목사님의 열정은 알았으나 이번에 유스를 데리고 선교하는 것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또한 이너시티 선교사로 이 지역에서 우리를 대신해 섬기는 김봉수 목사님의 섬김 또한 귀하고 복된 것이었습니다. 헌신하여 이 곳까지 내려와 섬김 12명의 유스들, 그리고 이들을 자기 집을 오픈해 환영하고 기도하며 사랑으로 섬긴 집사님, 자기 자식들 이상으로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자비량으로 기쁨으로 섬김 집사님들의 동역이 저 이너시티안에서 사랑을 받은 분들과 아이들에게 귀한 열매로 맺혀질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자원하여 동역하는 이러한 작은 역사들이 우리 공동체 안팎으로 계속해서 일어나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산 제물의 섬김이 넘치길 소원합니다. 헌신하여 섬기신 모든 분들께 주님의 기쁨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2015년 2월 13일 금요일

"목사님! 변하지 마세요!"

 
Peter is changed
개척 첫 예배를 드린후 지난 1년 동안 가장 많이 듣은 말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목사님! 행복합니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목사님! 변하지 마세요”라는 말입니다. 개척을 해보니 마냥 축하 받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교회를 진정으로 세워 주시기를 구하기에 진중한 마음이 더 들어 조심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더 많이 듣는 말이 "목사님! 변하지 마세요" 라는 성도님들의 당부입니다. 그 말이 그냥 당부가 아니라 많은 눈물과 아픔속에서 간곡하게 나오는 말임을 알기에 더욱 깊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어느 날 등록한 성도님 가정에 심방을 갔는데 어머니가 교회가 좋고 은혜가 있어 회복이 되어 좋다고 하니 함께 나오는 아들이“권 목사님도 변할수 있어”라고 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면서 꼭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합니다.
 
우리 성도님 중에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제발 변하지 말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얼마 전에는 한인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미국교회를 다니다가 저희 교회 소식을 듣고 오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도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성도님들의 “목사님 변하지 마세요” 라는 말이 늘 마음 한 켠에 남아 있습니다. 그 말을  계속해서 마음 깊이 남겨 두고 싶습니다. 그 한 마디가 바로 주님의 음성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종도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기에 변할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어떤 분은 이미 변했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개척한 후 처음 걷는 길이니 때로는 외롭게 기도하며 홀로 결정하고 추진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또한 여러가지 복잡한 사안들이 다가왔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주춤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소리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기도하며 묵묵히 함께 하시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새벽 말씀에도 솔로몬이 하늘의 지혜와 세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부귀와 영광을 다 가졌지만 그도 변했습니다. 부패한 인간의 죄성 위에 온갖 복을 받으면 좋을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복이 독으로 바뀔 가능성이 많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다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이 문제는 해결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아담이 죽고 예수님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했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싸움이 변하느냐? 변치 않느냐? 의 영적 싸움의 결정판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싸움을 제대로 하면 그 심령이 제대로 변화됩니다. 아담의 욕구를 물리치고 예수님의 선한 욕구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종의 소원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변하고 싶습니다. 제대로 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에게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갈수록 오히려 “목사가 제대로 변했구나”하는 위로 한마디를 내 뱉을 수 있도록 섬기고 싶습니다. 그 길은 오늘 이 순간도 내 속에 아담을 죽이고 예수님으로 사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인생의 골인지점에 서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만날 때까지 진정 그렇게 살고, 그렇게 목양하다 가고 싶습니다. 부족한 종이 세월이 갈수록 진정으로 변화되어 주님을 닮아 가도록 그렇게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함께 다같이 그렇게 변화되길 기도합니다. '오 주여! 이 종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사 진정으로 제대로 변화되는 목사가 되게하소서!' 아멘.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말의 힘줄을 끊어라!"

말의 힘줄은 파워를 의미한다
최근 새벽기도 말씀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다. 늘 은혜를 주시는 말씀들이지만 특히 심령 깊이 확신으로 다가온 말씀이다.

역대상 18장 6절의 말씀인데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동일한 말씀이 13절에 또 한번 나온다. 한 장의 본문에 이처럼 두 번이나 반복되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다윗의 승리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좀더 자세히 보면 6절은 북쪽으로 나갈때고, 13절은 남쪽으로 나갈때다. 곧 사방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승리를 안겨주신 것이다. 물론 이 승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다윗의 언약으로 이어가시며 그 약속대로 역사하심이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처럼 사람이 꺽을 수가 없다. 하나님 앞에는 대적이 없다. 그러면 왜 다윗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기 때문이지만 다윗편에서는 무엇을 하였는가?

이전에는 이 말씀의 앞 구절이 눈에 안들어 왔었다. 그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는 승리의 구절만 들어왔다. 목사의 눈으로도 내가 보고 싶은 구절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새벽묵상에서는 달랐다. 앞의 3,4절이 크게 다가왔다. 소바 왕 하닷에셀과 다윗의 하맛에서의 싸움 사건이다. 이 전쟁에서 다윗은 소바 왕에게서 병거 천대를 빼앗는 승리를 거둔다. 그런데 다윗이 승리 후에 이상한 일을 행한다. 곧 병거를 끄는 말 가운데 백필만 남겨두고 구백필의 발의 힘줄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상식적이지가 않다. 천필의 병거면 얼마나 나라에 힘이 되겠는가? 얼마든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다. 그런데 90%를 버린다. 다 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다윗이 왜 이렇게 행했을까?

묵상은 폭포수처럼 은혜를 부어준다. 다윗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왕을 달라고 하면 왕은 세가지는 하지 말고 한가지는 반드시 행하라고 하셨다. 그 중 하나가 병거를 많이 갖지 않는 것이다. 왜 병거를 많이 갖지 말라고 하셨는가?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의 병거요, 힘이시요, 능력이 되시기 때문이다. 만약 왕이 병거를 많이 소유하고 더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보다 군사력을 힘으로 삼는 증거가 된다. 세상은 그렇다. 힘을 추구한다. 권력을 의지한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다르다. 오직 하나님만이 힘이시다. 다윗은 바로 이 말씀을 간파하고 90%의 말의 힘줄을 끊어 버린다. 그의 고백이 무엇인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이처럼 힘이 되신 하나님과 말의 힘이 어찌 비교 될 수나 있겠는가? 그러니 다윗의 믿음의 결단을 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오늘날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믿음의 사람이다.믿음은 무엇인가? 말의 힘줄을 끊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으로 삼았던 것,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것,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자리잡고 왕노릇하려는 것, 많은 경우 그것은 우리 자아요, 사람이요, 물질이요, 야망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힘줄처럼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들을 끊어내지 않고는 결코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 할 수가 없다. 믿음이 무엇인가? 내가 의지하던 것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작지만 실제적인 끊음의 결단은 어디로 가든지 승리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누리게 한다. 지금 이 순간 성령께서 끊어야 할 것을 깨닫게 하시는가? 당신이 하나님보다 더욱 붙들고 있는 것이 있는가? 지금 끊어라! 그러면 비로소 경험하게 될 것이다. (*)


2014년 10월 27일 월요일

"도고 기도"

임재하시는 하나님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면서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어떤 특정한 사람의 것이 아닌 모든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열쇠를 잘 사용하는 사람은 하늘의 보고를 받아 누리고, 그 열쇠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의 보고를 닫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선물을 다 받아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임하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우리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고 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두 손은 놀랍게도 한 손은 하나님의 보좌를 붙잡고 다른 한 손은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의 어깨를 붙잡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소와 시간과 상관없이 우리는 기도의 영적네트워크로 서로를 도울 수 있습니다. 사실 남을 위해 하는 기도를 그동안 중보기도로 지칭해 왔습니다. 그러나 중보기도는 오직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mediator)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보좌 우편에서 이 땅의 자기 백성을 위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모르고 사용해서도 안되는 것이지만 알고 그렇게 계속 사용하는 것은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중보기도자입니다” 라고 하면 예수님 자리를 빼앗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고 겸손한 사람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성경적 용어를 제대로 사용해야만 제대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성경대로 중보기도는 예수님이 하시는 기도로 정리해 드립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위해하는 기도를 무엇이라 칭해야 합니까? 성경에서는 도고 기도라고 합니다.  '도고'는 헬라어로 '엔튜크세이스' 라고 합니다. 딤전 2:1, 딤전 4:5 절에 나옵니다. 그 뜻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기도,탄원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도고(禱告:intercession)는 ‘이웃을 위한 기도’(Prayer to God for Neighbor:NIV) 입니다. 반면에 딤전 2:5에서 '중보'라는 헬라어는 '메시테스'입니다. 이 말의 뜻은 계약을 맺기 위해 두 사람 사이를 중보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곧 예수님의 중보적 사역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에 걸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 누구도 중보자가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새언약의 중보자가 되신다(히9:15)는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감히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중보자라고 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고와 중보라는 말의 헬라어 원뜻이 다름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드리는 기도를 중보기도라 하는 것이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도고기도라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욱 예수님의 중보기도와 성도간의 도고기도로 더욱 강건하게 세워져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귀하게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우리 LWC 안에 새롭게 도고기도사역(담당 황희순 권사)이 열릴 것입니다. 도고기도에 겸손함과 열정으로 참여하여 주님 나라와 교회와 성도를 위해 도고하는 역사가 넘치길 소원합니다.(*)


2014년 10월 1일 수요일

설립감사예배, 주님께 영광올립니다!

KM 주일2부 예배
예수님의 생명값으로 세우신 교회가 오늘날 이 땅에 세워질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물론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말씀으로 사는 교회의 비전은 교회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이 땅에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주시도록 간구하고 그것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세우시려 한 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현이요, 브랜치입니다. 이 땅에 성도는 교회공동체로 하나가 되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다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로 편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교회는 그 나라를 대망하고 사모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에 우리 공동체가 설립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이 주신 선물 중에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받아 누리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지난 2월9일에 첫예배를 드릴 때가 기억납니다. 벌써 오래된 역사 같습니다. 이제 8개월이 지나 이처럼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교회를 세워가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리는 예배를 드리게 되어 참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이제 막 예수님의 생명으로 태어난 우리 말씀으로 사는 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워져 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참으로 주님 앞에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설립감사예배는 우리 공동체의 축제의 날입니다. 이 날은 외부의 손님들도 초대하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에 대해 함께 감사하고 함께 기뻐하는 날입니다. 특히 10월 첫째주일로 설립기념주일을 정한 것은 우리 영어 교회인 CCC가 바로 3년전 10월 첫 주부터 예배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인교회 역사상 하나님께서 EM이 KM의 개척을 돕는 초유의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선물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독특한 정체성입니다. 대부분의 한인교회의 역사는 KM이 먼저 교회를 세우고 필요에 따라 EM이 세워지는 현실이다 보니 EM을 단지 한 부서나 자녀들의 모임정도로만 인식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다르게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한 몸에 양팔이 있듯이 CCC와 LWC는 건강한 한 몸의 지체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신 이 역사에 감사하며 제자도와 말씀과 성령으로 온전히 무장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의 교회는 여전히 전투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대적 사명인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밖에 있는 비진리와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며 주님의 날을 준비하고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해야 합니다. 이 첫걸음부터 놀랍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주님의 몸이 되길 소원합니다. (*)


2014년 9월 3일 수요일

엘리사의 현실감각


새벽성경강해를 통해 개인적으로 받는 은혜가 큽니다. 평생 새벽성경강해의 꿈이 이제 실현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은 엘리사의 현실감각에 큰 은혜를 받고 새벽묵상을 짧은 글로 함께 나눕니다.
 
아람 왕이 번번히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려 작전을 세우고 진을 쳐 기다려도 어떻게 된 것인지 이스라엘은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아람 왕이 침상에서 하는 생각까지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람 왕은 도단성읍에 머무르고 있는 엘리사를 잡으러 군대를 보냅니다. 아침에 문을 열고 밖에 아람 군대가 포위한 것을 본 사환은 엘리사에게 어찌하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습니다. 그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이 말은 곧 현실이 됩니다. 엘리사가 그 청년을 위해 기도하자 그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도 아침에 문을 열면 하루와 세상의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현실이라고 굳게 믿고 두려움 가운데 삽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 현실을 엄연히 인정하면서 그 현실너머 또 다른 현실이 있음을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바로 보이지 않은 현실세계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세계가 있음을 본문에서 엄연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가운데 어느 것이 현실입니까?
영안이 닫혀있는 사람은 보이는 세계만이 현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려 있는 사람은 보이는 세계도 현실임을 직시하고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사의 현실감각입니다. 눈이 열린 청년도 두 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두려움은 변하여 감당할 수 없는 기쁨과 담대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두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삶에 처한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직시하고 삽니다. 그러나 그 삶에 휘둘리거나 두려워하여 절망가운데 처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에는 또 다른 현실인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하심이 똑똑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눈을 갖은 자는 행복자입니다. 그 사람은 보이는 현실을 보이지 않는 현실이 이기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엘리사의 현실 감각 속에서 승리와 영광의 삶을 사시기를 기도 드립니다.(*)